칼빈의 살인 행각의 실예
칼빈에 의해 참혹하게 살해된 세르베토
(1)신교의 역사를 바꿔놓은 기념비적 세르베토 사건칼빈이 세르베토를 불로 태워 죽인 사건은 신교의 개념을 무너뜨린 충격적이고도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이 왜 중요하느냐 하는 것은 단지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개신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은 전환기적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을 개기로 개신교도 종교상의 이유로 얼마든지 종교재판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관계가 공식적으로 남게 된 것이다.
칼빈의 세르베토에 대한 화형은 당시 유렵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으며, 이로 인하여 칼빈만이 아니라 신교에 대한 일반의 평가조차 냉혹하게 선회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구나 세르베토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에 그 충경의 파장은 클 수 밖에 없었다.
카스텔리오는 세르베토가 칼빈의 신학사상에 문제를 제기하다 부당한 칼빈의 손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증언하였다.
‘그리스도인인 세르베토라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독하지는 않았지만 칼빈의 이론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명에 씌워져 그토록 괴로운 죽음(산채로 화형)을 당한 것이 아니다. 그는 오직 칼빈의 세르베토는 불길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Stefan Zweig. op. cit. p.169)
‘그리스도인 세르베토는 불길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Ibid.175)
세르베토는 오늘날 자주 찬양되는 자유사상가나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세르베토는 기독교 영역안에 머물러 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칼빈의 삼위일체설과 칼케톤 회의에서 결정된 기독론, 유아세례에 대한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 대한 견해에 대하여 비판하였다.(미켈 세르베토
(2) 개신교의 명예를 지워버린 세르베토에 대한 처형
칼빈이 세르베토를 불태워죽인 것은 종교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개신교의 명예를 단번에 지워버렸다. (「앞의 책」 조찬선 op. cit. p.168,169참조) 개신교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가진 사람, 자유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지지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사실상 개신교는 종교재판을 도입한다는 것과 사람에 대한 살상은 용납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카톨릭의 교의와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개인들의 신앙을 존중하는 것이 신교에 대한 기대였다.
하지만 기런 기대감은 세르베토에 대한 처형으로 사실상 무너지게 되었고, 동시에 신구교 성직자들에 의한 상대 지도자들을 제거하기 위한 치열한 살상적 사건들(Encyclopaedia of the Social Science' Ediwin R. A. Seigman. '사회과학원론'中央出版. 1981. 3. 5. p.214 ; 종교전쟁의 극치를 보여준 것으로 카톨릭과 신교의 성직자들에 의한 상대방의 지도자들에 대한 암살을 자행하였다. 양자의 지배자(신구교)들은 상대방의 전제군주를 제거하는 것이 신에 대한 봉사라고 간주하고 암살을 자행하였다.
그 예로 홀랜드의 오랑에 公 위레름이 5차에 걸친 암살시도를 피하기는 했으나 결국 1584년 발사라르-제랄드(Balthasar-Gerard)흉탄에 쓰러졌고 영구의 엘리자베드 여왕은 15차 이상의 살해시도를 피했고, 프랑스의 앙리 4세는 19명의 암살시도를 피했으나 그 역시 1610년에 리바이야끄
이후 신교에 대한 기대감은 급격하게 퇴색해 가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은 일련의 불관용적 사건들은 서구교회 침몰의 시발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떻든 카톨릭과 동일한 교리, 동일한 마녀재판과 종교재판을 통한 인간 사냥을 자행한 칼빈에 의해 개신교의 명예는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이로 말미암아 카톨릭의 참혹한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을 비판하는 곳에 칼빈과 개신교의 이름으로 종교재판과 마녀사냥에 대한 비판이 함께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3) 칼빈은 세르베토를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죽였다.
역사가들은 칼빈이 세르베토를 가장 가혹한 방식인 화형으로 처형한 것을 증언하고 있다. 카스텔리오는 이를 확인해 주고 있다.
‘최초의 이단자 처형이 바로 이 가장 잔혹하고 끔찍한 화형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 잔인성으로 이름 높은 중세에도, 화형의 경우에 대개의 경우 사형수들은 화형대에 묶이기 전에 미리 목졸려 죽어 있거나 아니면 마취된 상태였다.(Stefan Zweig. op. cit. p.159) <칼빈은 주저없이 무자비하게 화형을 선택하여 집행토록 한 것이다.>
‘칼빈에게 세르베토의 영혼을 구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오로지 칼빈 해석의 절대권위를 강화하기 위해서만 샹펠의 장작더미에 불을 붙인 것이다.
세르베토는 하나님을 모독하지도 않았고, 그는 오직 칼빈의 어떤 주장을 부인했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것이다.
그런데 불길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 세르베토는 절대로 무신론자가 아니었다.’(Ibid. 1998. 4. p.169) 고 현장에 있던 카스텔리오는 전하고 있다.
(4)쇠사슬로 묶고 야윈 세르베토의 몸뚬이에 불을 지르다
칼빈의 교육목사로서 세르베토의 화형을 직접 목격한 카스텔리오(Castellio)는 화형 당하는 끔찍한 과정을 증언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그 실상을 말하였다.
‘<세르베토>는 쇠사슬로 화형대에 묶였다. 야윈 모뚱이 위로 밧줄이 너덧 번이나 둘렸다. 형리는 책과 세르베토가 칼빙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극비리에 보냈던 그 원고를 살아있는 몸뚱이와 잔인하게 파고드는 밧줄 사이에 끼워 넣었다.
마침내 세르베토는 머리 위에 끔찍한 고통의 면류관이 씌워졌다. 유황을 묻힌 잎으로 만든 관이었다. 이 모든 잔인한 준비를 마침으로써 형리의 일은 끝났다.
이제 그가 장작더미에 불을 붙이기만 하면 되었다. 살인이 시작된 것이다.( Ibid. p.164)
사방에 불꽃이 솟구쳐 올랐을 때, 고문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이 한 순간 몸서리치며 물러설 정도로 끔찍한 외침소리를 토해냈다.
곧이어 연기와 불길이 고통으로 죄어드는 육체를 감쌌다. 그러나 점점 더 끔찍하게 천천히 살아있는 육체를 갉아 먹는 불길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밥는 사람의 날카로운 고통의 신음소리가 여전히 울려 나왔다.
그러다가 마지막 고통의 외침이 들렸다. ‘예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형언할 길 없이 두려운 죽음의 투쟁이 반시간이나 더 계속되었다.
그러고 나서야 만족한 불꽃이 잦아들고 연기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검게 탄 기둥에는 시커멓게 탄, 연기를 내뿜는 덩어리가 빨갛게 달구어진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더는 인간의 어떤 형체라고 여겨지지 않는 끔찍하게 녹아내린 모습이었다. 한때는 하나님의 영혼이 깃들어 숨 쉬었던 한 피조물이 이제는 끔찍하게 역겹고 냄새나는 한 오물덩이로 변하였다.’ (Ibid. p.151) 고 증언하였다.
이것이 칼빈이 처형한 세르베토가 불에 태워지며 오물덩이로 변해가는 참혹한 과정이었다.
(5) 칼빈이 세르베토를 화형시킨 것에 대한 역사가들의 평가
칼빈의 이러한 행태를 보고서 그를 옆에서 직접 지켜본 카스텔리오는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불과 물로 살해당하고 살인자와 도둑보다 더욱 잔인하게 취급을 받고 있는데 오늘날 누가 기독교도가 되려 하는가’라고 (Ibid. p.192) 개탄하였고, 200년이 지난 후 ‘로마제국의 쇠망사의 저자’ 에드워드 기본(E. Gibbon)은 이 죽음을 평가하기를 ‘이 하난의 희생(세르베토에 대한 화형) 이 종교재판의 화형대에서 사라져 간 수천명보다도 더 나의 가슴을 흔들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르베토의 처형을 두고 볼테르의 말을 인용하면서 ‘개신교에서 일어난 최초의 종교적 살인이었고, 따라서 개신교 원래의 이념을 분명하게 부정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Ibid. p.167) 라고 평가했다.
한마디로 이 사건은 개신교를 죽인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칼빈의 인간사냥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였고 그의 계속된 살상행위로 인하여 개신교는 카톨릭과 함께 서구사회에서 동일하게 비난 받고 추락되는 운명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심상용 목사(월드크리스챤성경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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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2005-0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