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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신학자 이종성 원장의 역사왜곡의 실상과 칼빈의 세르베토에 대한 화형

운명으로 몰아 세운 이종성 원장의 역사에 대한 기만
* 칼빈신학자 이종성 원장의 역사왜곡의 실상과 칼빈의 세르베토에 대한 화형

1) 네 감독관의 죽음에 대한 이종성 박사의 왜곡된 주장


(1) 이종성 원장의 역사왜곡과 무고한 비난

칼빈 신학자 이종성 원장(기독교 학술원)은 ‘칼빈’이란 저서에서, 제네바에서 칼빈이 자신을 추방했던 사람들에 대한 보복으로 사형 시킨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의미를 부여했다.

‘3년 전에 칼빈을 괴롭게 하고 그를 추방했던 네 감독관은 이미 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이 폭동을 일으킬 계획을 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선고를 받자 두 사람은 도망가고 말았다.

한 사람은 성벽을 넘어 도망하려다가 재기 불능의 중상을 입었고 마지막 사람은 관원에게 잡혀서 사형을 당했다. 이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다.

이제부터 칼빈의 적들이 없어서 일이 순조롭게 추진될 것 같기도 했다’고(李鍾聖 op. cit. p.43) 주장하였다.

이종성 원장이 밝힌 앞의 네 감독관이 과연 어떠한 경위로 사형선고를 받고 또 죽어야 했는가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실상을 밝혀볼 필요가 있다.

이종성 원장은 뒤에가서 칼빈을 추방했던 네 감독관에 대하여 ‘악질적’이라고 매도하엿는데, 과연 네 감독관이 그렇게 악질적이었는가에 대하여 우리는 역사적 본질을 바로 직시하고 아직도 왜곡된 역사가 활개하는 현실을 바로 직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2)칼빈과 네 감독관 중 누가 과연 더 악질적이었나

이종성 원장이 ‘악질적’이라고 표현한 네 감독관이 악질적이었는지, 칼빈이 더 악질적이었는지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악질적인 가에 대한 진상은 반드시 규명되어져야만 한다. 그 역사적 진실을 잠시 사실 그대로 살펴 보도록 하자. 필자는 당시의 정황을 직접 목격하고 고발한 카스텔레오 목사의 증언을 그대로 옮겨 놓고자 한다.

1536년 6월경 칼빈은 스트라스부르그에 갈 생각으로 제네바에 잠깐 들른 기회에 제네바에서 구교를 무너뜨린 파렐(Willian Farel)의 방문과 초청으로 우여곡절 끝에 제네바 시의 성서강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칼빈이 제네바에서 할 일은 제한되어져 있었으며 그의 임용조건은 성서강사였다. ‘칼빈이 제네바에서 할 일은 성서를 가르치는 교사의 직분이었다’는(Ibid. p.23) 것이다. 이종성 박사의 확인에서도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칼빈의 일의 영역은 분명하였다.

이렇게 제네바 시에 성서강사로 초빙받은 칼빈은 석달만에 ‘교리문답서’와 ‘개신교 기본원칙 21개 조항’으로 만들어 제출하였다.

칼빈은 이를 토대로 제네바의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 따르기로 맹세하는 일을 직권적으로 강요하였고 교회에 완전한 복종을 요구하였다.

칼빈의 이 같은 요구는 루터나 쯔빙글리도 요구한 적이 없는 것으로 시민들의 법적, 도덕적 태도에 대해 형벌을 내릴 권한과 시 당국을 자신의 명령과 지시를 실천하는 기관으로 격하시키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를 쏟아 부은 것이다.

‘법적으로 그런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으므로 그는 제명(際名)이라는 수단을 동원해서 그러한 권한을 스스로 만들어냈다’(Stefan Zweig. op. cit. p.44참조)

‘그(칼빈)의 생각에 따르면 교회는 모든 인간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요할 권리뿐 아니라 의무를 가지며 단순히 열의가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벌을 내려야만 했다.

–중략--

그의 <교리문답서>는 단순히 신앙의 노선만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법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제네바 시민들이 한 사람 한 사람 공개적으로 이 교리문답을 받아 들이고 그에 따르기를 맹세하는 일을 강요해 달라고 시의회에 요구하였다.

이 맹세를 거부하는 사람은 곧바로 도시를 떠나라는 강제 명령을 받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종교문제에 관한한 칼빈의 요구와 견해에서 머리카락만큼 벗어나도 제네바 성안에서 살 수 없다는 뜻이었다.

--중략--

설교자 만찬에 초대 받지 못한 사람은 -- 바로 여기에 이 무게가 실려있다. --

시민으로서도 끝장이 나버린다. 아무도 그와 이야기하거나 물건을 팔거나 사서는 안된다.

종교적 관청이 이용당하는 순전히 종교적인 조치가 곧장 사회적인 조치로 바뀌고 사업장의 보이콧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이렇게) 추방된 사람이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설교자가 요구하는 공적인 참회를 거부하면, 칼빈은 그에게 추방을 명령하였다.

칼빈의 적대자는 비록 가장 존경받는 시민일지라도 제네바에서는 계속 살 수 없었다. 종교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은, 그때부터 시민으로서의 생존에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전에는 도시의 주교도 갖지 못한 무기였다.

–중략--

대단히 합목적이고 냉혹했던 칼빈은 이러한 추방권을 설교자들과 종교국에 넘겨 주었다.

이 무시무시한 형벌을 규칙적인 형벌로 만들고, 테러의 효과를 잘 계산하는 심리 전문가로서 이 형벌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서 자신의 개인적인 권한을 무한정 높였다.

--중략--

(처음에 제네바 사람들은) 정직한 마음으로 종교개혁에 대하여 동의를 표시하였다’(Ibid.)고 하였다.

또한 제네바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중앙광장에 모여 들어서 독자적인 인간으로서 손을 높이 들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 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형리의 감독 아래 갈레 선의 포로들처럼 열명씩 짝을 지어 도시를 가로질러 가 교회에서 21개조 조항에 대해 맹세해야 한다는 사실에 공화주의적인 자존심이 몹시 상했다.

–중략--

그리고 도대체 이토록 건방지게 구는 이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시민들은 스스로 질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이웃나라 프랑스에서 흘러 들어온 망명자에 불과하였다.

(이에 불과한 사람이) 이제는 이땅에 뿌리를 박고 살아온 시민들에게 수치를 안겨주고 책망을 하는 것이었다.

자기들이 고용한 망명자가 이제와서 누구는 제네바에서 살아도 되고 누구는 안되는지를 결정하고 있다니! –제네바에서 공화주의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마치 거리의 도둑처럼’ 야단맞을 생각은 없다고 공공연히 떠들었다.

몇몇 거리, 특히 알레망 거리는 맹세를 거부하자고 큰 소리로 투덜거렸다. 자기들은 맹세도 하지 않을 것이고 이 떠돌이 가난뱅이들의 명령에 따라 고향을 떠나지 않겠노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칼빈은) ‘작은 시의회’를 이용하여 맹세를 거부한 사람들에게 추방령을 내릴 수는 있었지만 이 인기없는 조치를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선거의 결과가 드러나자 시 당국이 칼빈의 독선을 거부하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중략--

새로운 시의회의 다수파가 그에게 반대하면서 평화를 위해 이 거친 위협과 제명을 그만두고 베른 교회의 온전한 사상을 받아 들이자고 공손하게 설득해 왔지만 칼빈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어떠한 타협도 그의 권위적인 천성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시의회가 그에게 반대하는 순간, 모든 사람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그는 주저없이 자신의 상급관청에 대항하는 혁명가로 돌변해 버렸다.

공개적으로 그는 강단에서 ‘작은 시의회’를 욕하고 자기는 ‘주님의 성스러운 육체를 개들에게 던지기 보다는 차리리 죽여버리겠다’고 공언하였다.

다른 설교자는 교회에서 시의회를 ‘주정뱅이 집합소’라고 불렀다. 칼빈의 추종자 무리는 바윗덩이처럼 꿈쩍도 않고 당국에 저항하였다.

시 당국은 사제단의 그토록 도전적인 거부를 참을 수 없었다.

우선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설교단을 남용해서는 안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가르치라고 분명한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칼빈과 그 일파는 이런 당국의 명령을 무시해 버렸기 때문에 --그들 중에 가장 대담한 사람 쿠르토(Courtauld)가 공공연히 폭동을 선동한 죄로 체포되었다.

여기서 교회와 시의 당국의 공개적인 전쟁이 선포되었고 칼빈은 이 싸움을 당당히 받아 들였다(Ibid.)고 하였다.


(3)압도적으로 찬성한 칼빈에 대한 추방결정

칼빈에 대한 제네바 시당국의 인내심은 끝났다. ‘당국은 최고 심급기관인 200인 위원회를 소집하였다.

그리고 시 당국은 당국의 명령을 일부러 무시한 칼빈과 공용된 사제들을 해임할 것인지 의결에 부쳤다. 압도적인 다수가 찬성하였다.

반란을 일으킨 사제들은 직위에서 해제되고 사흘안에 도시를 떠나라는 선고를 받았다.

칼빈이 지난 18개월 동안 이 도시의 수많은 시민들을 위협하였던 벌이 바로 자신에게 내려진 것이다(Ibid. p.41~52참조).

그 결과, 칼빈은 프랑스 사람으로 스위
칼빈

2005-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