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트리뷴 로고

크리스찬트리뷴의 모든 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크리스찬트리뷴의 모든 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트리뷴트리뷴

오리베이라 목사의 요한 복음 강해

사도적 비전과 기름부음을 받으라!

종교적인 생각과 관습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과 기름부음을 제한시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환영하며, 성령의 바람을 타고 이 시대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순풍에 우리의 몸을 실어야 합니다. 사도적 비전과 기름부음은 우리의 삶에 큰 변화와 능력을 가져옵니다! - 오리베이라목사 -


하나님의 기적이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는 것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 삶에 일어날 때 종교적인 생각을 가지고 바라봐서는 안됩니다.

종교적 틀에 매인 생각을 버리십시오. 성령님의 운행하심과 인도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기적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는 새 포도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새로운 맛을 부여 받았고 새로운 기쁨,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 사도적인 기름부음 안으로 교회를 인도하시는데, 우리는 종교적으로 매이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삶에 진보가 나타나도록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환영하고 또한 순종해야 합니다. 


1. 성령과 종교적인 것 : 낮과 밤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1-3]
니고데모는 종교적인 것을 상징합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는데, 종교적인 관점은 밤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어둠의 영역에 있습니다.


종교적인 틀의 관점은 우리 삶에 빛이 임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을 택하고 또한 빛을 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운행하심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빛을 선택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빛을 선사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3:3]

잉태를 했던 아이가 세상에 나오면 아기는 빛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어둠의 영역에서 벗어나 빛 가운데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자궁에는 빛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궁을 벗어나 세상에 나올 때 아이는 빛을 보게 되고 울음을 터트리며 빛이 있는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합니다.
두 말할 것 없이 빛은 어두움보다 좋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받으십시오. 종교적인 습성과 틀은 밤과 연결되지만 사도적인 비전과 열정은 우리 삶에 빛을 가져다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또한 우리 삶의 빛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빛을 받으며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한 예로 종교적인 영은 주일날 교회 가는 것에 지나치게 매이지만, 사도적인  비전 안에 있는 성도는 매일 주의 전을 찾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생각이 종교적인 것에 얽매여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이 시대에 빠르게 운행하시는 성령의 인도에 합류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람은 빛을 사랑합니다. 빛을 사랑하면 성령의 운행하심 가운데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됩니다.


2. 성령과 종교적인 것 : 영과 육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3:6]
육에 속했다는 것은 영에 속하지 않은모든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은 육적인 것에 속해 있습니까 아니면 영적인 것에 속해 있습니까?
끊임없이 지속되는 영적 전쟁은 다름아닌 영적인 영역과 육적인 영역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이 영적 싸움에서 항상 성령의 인도하심을 택해야 합니다.



3. 성령과 종교적인 것 : 바람과 고착화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요3:8]
예수님은 성령으로 난 사람을 바람에 비유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즉 성령님과 함께 하는 우리는 바람과 같습니다. 그러나 육에 있는 사람은 변화의 바람에 무감하며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 안에 함께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육의 사람은 감각적입니다. 성령님은 말초적인 특성과는 다르신 분이십니다. 영적인 가운데는 인식과 이해가 있고, 육적인 것에는 감정과 감각이 있습니다.
우리가 성령 안에 거하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성령의 바람의 흐름에 몸을 싣게 됩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은 영적인 사람이 가야 할 길을 지시하십니다.


성령의 바람, 성령 안에 거하면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그러나 육적인 것 가운데 있으면 우리에게는 진정한 자유함이 없습니다. 성령님의 인도가 있으면 인간적인 계획이 아닌 성령님의 역동적인 움직임 안에서 바람과 같이 변화 가운데 있으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곳에 거하게 됩니다.

종교적인 습성들은 성령님 가운데 거하기를 싫어합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유함을 누리는 오늘이 바로 낮이며 빛이 있는 때이고 성령 안에 거할 때입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과 성령님의 인도는 다릅니다. 자유함을 누리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우리에게 자유함이 있습니다.


4. 성령과 종교적인 것 : 하늘과 땅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3:12]
종교적인 사람들은 땅의 일에 집착합니다. 그들은 무엇이든 직접 보고 입증되어야 믿습니다. 예를 들어 돈이 눈앞에 보여야 그것을 가지고 행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늘의 차원을 이해하기 원하시고 천상의 발걸음을 걷기 원하십니다.

하늘의 차원이 종교적인 것들보다 한 차원 높습니다. 그 새로운 차원을 우리는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세상은 하늘을 조정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늘에 의해 통제받습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요3:14]


모세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왔습니다. 그 때 백성들이 여러 환경적 요인들 때문에 하나님과 모세에게 불평을 했었는데, 불평하는 자들은 불뱀에 물려 죽어갔습니다. 그 때 하나님은 놋으로 뱀을 만들라고 지시하셨고 막대기에 걸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처방이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죽어가던 사람들이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어 달리심으로 생을 마감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의 죄들이 사함을 받습니다. 놋뱀을 쳐다만 보더라도 그들은 살 수 있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하셨습니다.
빛을 바라보고 빛 가운데 행하십시오. 어둠 가운데 거하고 밤에 있다면 예수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빛 가운데 있다면 십자가를 볼 수 있으며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자유함을 받고 대속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종교적인 영들은 정죄와 판단을 합니다. 그들은 죄를 근거로 하여 판단과 정죄를 합니다. 죄를 볼모로 판단을 합니다.


“예수의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36]

예수님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우리에게 오셨는데,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습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피 값을 피로 대신합니다. 그러나 사도적인 교회는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 받았음을 고백하며 용서합니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우리는 죄가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가 십자가에 못 박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해 해결책을 주신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자유함을 받았고 우리가 빛에 거하고 자유함 가운데 거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사도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도적인 흐름 안에 함께 거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카카오리베이라

2009-10-31